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문단 편집) == 영향 == > 우리는 [[독소전쟁|대조국전쟁]]의 참전자들과 자주 비교되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는 동안 우린 무얼 했을까요? 어느 한 청년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독일군의 역할'''을 맡았던 겁니다. (어느 군인의 회상 중) >------- > 뭘 써도 좋은데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 간의 형제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만은 빼주세요. 그런 건 없어요. 그따위는 믿지도 않고요. 전쟁터에서 우리는 하나였어요. 우린 똑같이 속았고, 똑같이 살아남기를 바랐고, 똑같이 집에 가고 싶어 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온 뒤 여기서는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또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요. 이 나라에서 좋은 건 다 연줄이나 특권을 가진 사람들 차지예요. 우리한테 피를 빚지고 있으면서 말이죠. >--------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수집한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들 및 유가족 수기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054055|아연 소년들]](Цинковые мальчики)> 중에서 > 우리가 시작한 전쟁은 [[공산주의|고귀한 이상]]을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민중을 적으로 삼은 전쟁이 되어버렸다.[* 소련인들은 아프간 전쟁 초반에는 정말로 이 전쟁을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거룩한 성전으로 생각했다.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은 한때 쿠바의 혁명가들과도 같은 사람들로 치켜세워졌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 > - [[소련]] [[공수부대#s-4.4|공수군]] [[중장]] 알렉산드르 레베디(Александр Лебедь)[* 레베디는 소련 해체 후 정계에 입문하여 1996년 대선에서 옐친을 지지한 공로로 국가안보위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보리스 옐친]]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후 2002년 [[주지사]]로 재직하던 중 항공기 사고로 52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moke.jpg]] 소련경제와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과장 되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cia 추정으로 1987년 지출 비용은 소련 군사지출에 2.5% 밖에 되지 않았고, 소련 태생의 영국 역사가 세르게이 라드첸코에 따르면 1984년에서 1987년간 지출이 75억 달러인데, 소련의 연간 군사예산이 1280억 달러인 것에 비하면 미미한 수치이다. 단지 붉은 군대의 위상이 실추되고, 시기상 2년 후 8월 쿠데타로 소련이 해체 되고, 미국 및 서방이 무자헤딘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있다. 또한 10년가량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은 당시 소련 젊은이들에게 [[반전주의]]와 염세적 [[허무주의]]를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초이]]도 반전 음악을 발표했다. 후술하겠지만, 소련 록의 부흥 역시 이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와 함께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에 빠진 군인들은 귀국 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련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아프간 참전군인들의 상당수는 술, 마약, 매춘에 쩔어 살았고 그 중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했다. 게다가 마약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크로코딜]]에 중독된 참전자들이 꽤 있다. 특히 이들을 통해서 소련 전역에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는 [[베트남 전쟁]] 전후 [[미국]]의 사회상과 비슷하다. 실제 베트남전 말기부터 마약중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가 되면 미국인의 최소 10% 이상이 중증의 마약중독자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 참전군인들의 상당수가 귀국 후에 [[알코올 의존증|술 중독]], [[PTSD]] 등으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빈민층으로 전락한 일부는 각종 흉악 범죄를 일으켜서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사병 참전자는 거진 대부분 하층민이 되었고 심지어는 장교 참전자 역시 위관급 정도는 사병 참전자와 별다를 게 없었다. 이렇다 보니 소련의 청년들은 군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병역기피를 시도했는데, 초기에 소련군은 병역기피가 적발되면 가차없이 수용소에 보내버리는 방식으로 강력히 대응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병역기피 방법이 교묘해지고 조직적으로 변하면서 결국 소련군 당국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이들 중 8만-10만 정도가 평상시 유지 숫자였다.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5,000여 명, 부상자 54,000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 탈영하거나 낙오된 이들은 러시아에서 지금도 찾고 있는데 귀환을 희망하면 모두 데려오고 있지만 일부는 아프간인 사회에 동화되어 아직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2013년에 그런 병사들 중 한 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http://edition.cnn.com/2013/03/06/world/asia/missing-russian-soldier-found-afghanistan/index.html|관련 링크(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8&aid=0002178847|관련 링크(2)]]]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다. 또한 친소련 아프간 정부군은 1만 8천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8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 보면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많은 것은 아니다. 전쟁 10년 동안 소련군 1만 5천 명이 전사했는데, 미군도 이라크 전쟁 첫 5년 동안 4,000명 이상 전사하였고 아프간 전쟁에서 [[ISAF]]는 11년 동안 3,300명이(이중 미군은 2,200명 정도) 전사했다. 2010년 6월에는 103명이 전사하였다(2010년 7월 미군 65명 전사)[* 2011년 8월에는 미군 70명이 전사했다.] (이라크는 2008년 이후 미군이 철군하면서 전사자가 감소하였지만 아프간은 2009년 이후 전사자가 증가하였다). ISAF가 80년대에 비해 발전된 보급/의료 지원체계[* AC-130, 무인정찰기, 토마호크, 향상된 방탄복, 피카티니 레일과 광학장비를 장착한 개인화기, 80년대라면 죽었을 병사를 급하게 후방으로 수송해서 팔다리를 절단하는 선에서 살려놓기 등.]를 갖췄으며 ISAF의 적 탈레반은 무자헤딘보다 대체로 규모와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점[* 무자헤딘은 서방세계로부터 군사 고문단과 물자를 지원받았고, 규모 또한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면 탈레반과 알 카에다, IS는 테러 지원국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제제, 미군의 집요한 공격 때문에 군사 고문단은커녕 물자의 수급조차 원활하지 않고 규모는 5만 명 선으로 추정된다.]을 감안할 때 소련군이 아프간과 이라크의 미군에 비해 열세한 전과를 올린 건 아니다. 시대 보정을 한다면 우세한 전과를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이나 미군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은 [[걸프 전쟁]]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군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만 붕괴시키고 빠졌으면 전사자가 14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은 무엇보다도 소련 군부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단지 소련군이 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아프간 전쟁은 소련군에게 있어 단지 '''전략적 실패'''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 특히 소련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아프간 전쟁 전까지 '''2차대전에서의 승리'''라는 막대한 정치적 명분으로 소련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실각, [[유리 안드로포프]]의 집권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출조차 항상 '''군'''에 대한 얘기가 함께 나온다.] 아프간 전쟁 역시 뒷배경에는 소련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고, 이런 소련군에 있어 아프간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군 차원에서 전략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실패였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을 치르면서 발생한 대규모 부상, 사상자와 소련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물론 미군도 전쟁범죄가 있긴 했지만 킬 팀과 같이 대부분 개인 혹은 몇몇의 만행에 국한된 것이었고, 적어도 탈레반 활동구역에 화학탄은 뿌리지 않았다.] 소련 국민들이 소련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아닌 소련 내 [[발트 3국]]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의 소련 산하 공화국들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해당 공화국 국민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침략 전쟁'''에 개입한 [[모스크바|'''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이는 '''조국의 수호자'''라는 소련군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위상 추락의 후유증은, 신생 러시아군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와 고급장교를 포함한 인적자원 유출, 그리고 [[제1차 체첸 전쟁|그로즈니의 굴욕]]으로 정점을 찍으며, 1990년대 내내 이어졌다.] 비단 정치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군은 1989년까지 지속된 아프간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한 이후 각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분쟁들에 대규모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들이 군사력 사용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데도브시나]]로 불리는 소련군의 극심한 병영부조리가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이전까지 소련 정부의 검열로 공론화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던 데도브시나는 아프간 파병 소련군에서도 계속된 부조리로 인한 탈영과 자살자가 수천 명 단위로 발생하고 소대, 중대 단위의 전투에서 미운 선임이 부상을 당했을 때 후임병들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려 하면서 사망률이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현상이 발견됨에 따라 결국 소련 공산당의 주목을 받는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다. 고르바초프는 이 문제를 시정할 것을 군부에 요구하였고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끔찍한 병영생활의 폭로, 병영문화의 개선 요구가 폭발하였지만 이것이 조직화된 것은 1990년의 일이었고 결국 제대로 개혁이 이뤄지기 전에 소련이 붕괴, 러시아군으로 계승되었고 경제적으로 박살난 러시아군의 병영 문화는 더욱 처참하게 돌아가다가 푸틴이 집권하고 나서야 조금 안정되는 추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단 무자헤딘 병력은 20만 ~ 25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어도 소련군이 무자헤딘보다 압도적인 무장을 갖추고 있어서 전투에서는 지기만 했다. 어떤 곳에서는 소련군 공수부대 39명에 무자헤딘 400여 명 중 200여 명이 전사하여 쓸려나가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3234 고지 전투이다. 러시아에서 [[제9중대]]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단 3234 고지 전투에서 소련 공수부대 6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는 등 소련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무자헤딘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60만-20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50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난간 난민만 500만명에 근접할 정도로 수백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어떤 도시는 전쟁 전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전후 계산해보니 단 2만 5천 명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소련군은 전쟁 기간 동안 민가를 상대로 [[사린]] 가스 등의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 당시 인구 1300만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으로서는 전쟁 때문에 무려 인구의 1/3 이상이 죽고 다친 셈이다. 4명 중의 1명의 여성이 남편과 사별해야 했고 2명 중 1명의 아이가 다섯살이 되기 전에 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8명 중 1명이 전투와 지뢰 등으로 불구가 되었다. 국토와 산업은 소련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초토화 작전에 완벽히 파괴되었다. 이런 고통을 전부 초래한 소련군은 89년 철수했지만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원조는 남겨놓고 갔는지라 90년대 초반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나지불라 정권 붕괴 이후에도 이어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을 피와 공포로 물들인 무자헤딘 분파들의 내분과 탈레반의 부상에도 중앙정부를 붕괴시키고 점령을 자행해 대혼란을 초래한 소련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걸 생각하면 소련은 아프간에 끝나지 않는 악몽과 헤아릴 수 없는 비극만을 안겨준 셈이다. 아프간이 소련의 침공으로 입은 피해는 인명 피해만 소련과 러시아가 81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고 이를 벅벅 가는 독소전 당시 소련 인구 1억 8879만명이 입은 피해인 2700만명조차 전체 사망자 숫자는 몰라도 비율로 따지면 근접하거나 추월할 지경이라는 점에서[* 독소전 소련 사망자를 2700만, 아프간의 소련 침공 당시 민간인 사상자를 100만명으로 잡으면 독소전 소련 사망자는 전체 인구의 6.9%,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간 사망자는 전체 인구의 13%] 아프간에서 소련군은 조국의 수호자들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조하는 상단의 소련 청년의 절규는 더욱 의미심장한 셈. 독일뿐만 아니라 추축 위성국들에게도 전쟁범죄에 대한 피해보상과 사과, 전쟁 배상금을 톡톡히 받아낸 소련과는 대조적으로 소련은 물론이고 후계 러시아는 침공에 대해 아프간에 일말의 사과나 조금의 배상금 지불 노력조차 한 적 없다. 오히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자 침공을 수행한 소련군 참전자들이 우리는 아프간인의 자유를 위해 탈레반과 같은 중세적 야만인들인 무자헤딘과 싸웠다며 자부심을 가지는 등 당대를 겪은 아프간인 입장에서 분통이 터지는 퇴행적인 모습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미국 이상으로 악랄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체첸]]에게 두들겨 맞을 당시조차도 러시아에서 앙케트로 러시아의 주적을 무작위 선정했더니 1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2위가 미국, 3위가 중국, 4위가 체첸이었다. 당시 [[체첸 사태|체첸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최대 굴욕을 안겨준 [[몽골-타타르의 멍에]][* [[몽골]]의 침공으로 240여 년동안 지배받은 역사를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아돌프 히틀러]]도 물리친 러시아가 당한 유일한 굴욕이라며.] 못지않은 멍에라고 부를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에 끼친 영향은 베트남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은 망하지는 않았지.~~ 한편 이 시기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간 수많은 무기들은 상당수 미국이 거액(예를 들어 스팅어 한 발에 10만 불)을 주고 되샀지만 남은 무기들이 '''미군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노리게 되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 정권(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만이 남았지만 희한하게도 소련군이 철수하고 난 뒤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나지불라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90년 나지불라 대통령이 정권을 겨냥한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부군의 주요 장성들을 [[숙군]]하면서[* 이때 쓸려나가는 이들이 바로 타라키와 아민이 세워놓았던 할크파의 장군들이다. 이들의 쿠데타를 방관해봤자 집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무신론 선포하는 막장 정책인데, 오히려 나지불라가 쿠데타를 진압했기 때문에 그나마 더 버틸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로 인해 정부군의 군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형세가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졌고, [[1991년]] 12월에는 소련이 붕괴되어 소련 해체 이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가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면서 이후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무자헤딘 반군들의 공세와 공산정권이 신임하던 장군 [[압둘 라시드 도스툼]]의 배신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철수하는 소련군을 보며 "아프간이 괜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데 멋도 모르고 쳐들어간 소련 놈들 보소." 하고 배를 잡고 비웃었지만[* 당시 미국인 교수들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 결정을 대놓고 비웃는 것이 MBC 뉴스데스크로 중계되기도 했다.] 20년 정도 후에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사돈 남 말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다음 해에 열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대부분의 서방권도 이에 동참한다.[* 참가한 일부 국가도 있었지만,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보내 이 대회 참가가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이에 열받은 동구권은 4년 뒤에 열린 [[1984 LA 올림픽]]에서 똑같이 갚아줬고[*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제외.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세력의 맹주이며 루마니아는 탈소련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참가하였다.], 이 반쪽짜리 올림픽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야 냉전과 함께 끝이 난다. 당시 소련군의 [[사기]]와 [[군기]]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 아프간에서 [[간염]] 걸린 [[병사]]가 11만 5천 명, [[장티푸스]] 걸린 병사가 3만 1천 명. 도합 42만여 명의 병사가 앓아눕는데도 의무대는 턱없이 부족했고 병사들에 대한 [[복지]]도 개판이었다. 그리고 전방의 병사들은 무자헤딘 때문에 하루 종일 10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으나 후방의 병사들은 군수품을 아프간 민간인들에게 팔아 비자금을 마련하면서 배를 불렸다. 심지어 야전병원의 소독용 알코올을 마시려고 빼돌려서 군의관들이 알코올 대신 석유로 소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당연히 전방 병사들과 후방 병사들의 갈등을 부추겼고 단합도 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영화 [[제9중대]]에서 [[총열]]이 휘어진 [[칼라시니코프 기관총|PKM]] 기관총이다. 원래는 멀쩡한 것이나 새 것을 지급해야 하는데 행정보급담당관이 몰래 아프간 민간인에게 팔아치우고 나서 땜방으로 이것으로 채운 결과이다.] 전투를 기피하기 위해 간염 환자의 오줌을 마시는 등의 꼼수도 횡행했다. 반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도 상당수가 좋은 꼴은 못 봤다. 죽지는 않더라도 팔다리는 물론이고 성기까지 절단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그 꼴 나고도 목숨은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군들이 소련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절단 부위에 최소한의 지혈 정도는 해주고 소련군이 회수하게 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장교]]들도 병사들처럼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려고 [[마약]]과 [[매춘]]에 찌든 자들이 많았다.[* 레스터 그로우의 산맥을 넘은 불곰 中] 고위 장교들의 경우에는 휘하 여군들을 회유해 마치 현지처처럼 두기도 했다. 즉 당시 소련군이 전투에서는 늘상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전쟁에서는 질 수밖에 없던 이유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군인들은 지금도 모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에 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 군인들은 대부분 참전 사실을 숨기거나 참전 사실을 밝히더라도 자랑은 하지 않을 정도로 대우를 못 받고 있었다. 다만 이건 언제까지나 옐친 시절까지 이야기. 푸틴 체제 하에서는 소련 시절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을 지양하고 합리적 비판을 추구하게 되면서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군인들에 대한 대우 자체는 다른 전쟁 참전군인들과 동등하게 적용받고 있으며, 민간인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국가유공자로 다른 전쟁 참전군인들만큼 인정받고 있다.[* 다만 이런 점은 베트남전 이후 미군 참전자들에 대한 여론의 비난과 배척이 참전용사들의 빈곤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미국인들이 받아들여 실패한 전쟁이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정부 및 군 수뇌부와 명령에 따라 끌려간 참전장병을 분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결정이 오판이라 해도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간 참전용사들은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러시아에도 자리잡은 결과이다.]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중앙아시아, 캅카스의 구 소련권 국가에서도 아프간전 참전 군인들이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것은 매한가지였다고 하며, 경제가 막장이던 1990년대에는 많은 참전용사들이 구걸을 하던가 납품팔이 등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다만 이 당시에 평범한 사람들도 하루벌어 하루살기 급급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참전군인에 대한 지원이 미비한것은 특기할일은 아니었기는 했다. 그렇지만 구소련권 아프간전 참전자들이 자의든 타의든간에 전쟁에 다시 뛰어든 경우는 흔했다. 소련 붕괴 이후로 소련 각지에서 전쟁이 터졌기때문이다. 우선 캅카스 3국에서 남오세티아 전쟁, 압하스 전쟁,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터졌고, 타지키스탄에서도 내전이 터졌으며, 몰도바에서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이 터지고 러시아도 [[체첸 전쟁]]이 터졌기때문에 베테랑이었던 아프간 참전용사들이 전쟁에 참전했다. 2014년 돈바스 전쟁 이후로 우크라이나에서도 아프간전 참전용사들도 나이가 든 이상 주력은 아닐지라도 전쟁에 참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후로 혼란이 지속되어서 공산정부군 참전자건 무자헤딘 참전자건 내전과 분쟁이 이어졌기때문에 혼란은 여전했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총을 쥐어야 했고 가족들과 함께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얻어맞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파일:TorontoVAZ.jpg]] > WE WILL NOT GAS [[라다|LADAS]] UNTIL... [[소련|SOVIETS]] WITHDRAW >우리는 소련이 철수할 때 까지 라다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 >1986년 [[토론토]]의 한 주유소 이 밖에도, 전쟁의 악영향은 황당하게도 [[캐나다]]에서도 발생했는데, 다름아닌 [[라다]] 社의 [[라다 쥐굴리|차량]]들을 몰고 다니던 차주들에게 불똥이 튀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차량 서비스를 못 받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